듣는 오디오북이 아니었으면 절대 완주할 수 없는 12권의 긴 대하소설을 끝냈다. 장장 3개월을 짬짬이 듣다 보니 점점 등장인물들에 동화되어 울고 웃고,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 스며들었고, 마지막 12권을 들을 때의 아쉬움이란 그 3개월간 꽤나 깊은 정이 들어서인가 보다.
변경은 한 가문의 4남매의 성장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6.25 전쟁 이후부터 70년대까지 이르는 대하소설로 그야말로 대한민국 격동의 60년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만큼 이문열의 역작이라고 불리는 작가의 소중한 작품이라고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문열 작가에 대해 전혀 사전지식이 없어서 처음으로 알아보았는데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 궁금할 정도로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인철의 삶과 비슷하였다.
그들 가문의 어려움은 그들의 아버지 이동영의 월북으로 시작된다. 한 대학의 학장일 만큼 지식인이었던 그들의 아버지는 교수들과 학생 몇몇을 데리고 월북하여 당국의 요시찰대상으로 항상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을 해야 했고, 언제나 사상을 의심받고 어딜 가나 감찰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항상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4남매의 각기 다른 고집과 이념은 자라온 환경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그들 부모의 올곧음, 고지식함과 세상이 주는 차가운 시선과 사상에 대한 의심에 사로잡혀 각 개인이 가진 성향 차이는 있었겠지만 그런 세상과 맞서야 하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오기와 끈기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라 생각이 든다.
명훈, 영희, 인철, 옥경 4남매의 각각의 스토리는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굴곡 있는 인생사로 일단 가장의 부재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뿐 아니라 연좌제가 시행되고 있던 때라 늘 아버지의 꼬리표가 따라다니기 때문에 이리저리 거처를 옮기며 숨어 살았고 그로 인해 자유롭게 뜻을 펼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첫째 영훈과 둘째 영희는 동생들에 대한 부담감과 책임감으로 본인들을 희생해야 했고, 두 동생들은 형과 누나의 희생을 알기에 그저 미안함으로 그들의 꿈을 펼치기보다는 차선의 선택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형제 중 어느 누구도 행복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결말이 되고 만다.
이 책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들의 삶을 통해 80년대의 시대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들이 겪었던 일들에 대한 감정이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어떤 사상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왜 그런 사상을 옹호하고 배척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도 들게 해 주었다.
여자로서 영희의 삶도 무척 흥미로웠다. 강인하고 대나무 같은 엄마와의 갈등,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성공하고 싶은 욕망, 그렇지만 가족들에 희생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의 삶의 모든 선택에 영향을 주면서 전혀 원하지 않는 삶의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미친 듯 열심히 살았기에 그 누구도 영희를 탓할 수 없는 그녀의 애잔한 인생이 정말 한 편의 드라마가 따로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12권의 긴긴 소설이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지만, 이 것만은 확실하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고, 읽는 중에 모든 주인공들에 대해 연민이 생기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장장 3개월을 그들 주인공의 삶을 대신 살았다고 할 만큼 몰입할 수 있고, 진한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물론, 윌라로 듣는 소설이었지만, 12권 마지막 챕터가 가까워지는 게 정말로 아쉬울 정도로...^^